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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국노 이완용 유언과 공덕비 ]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을사오적 중 하나인

이완용의 공덕비가 논란이 되고 있어요.

 

 

이완용 공덕비는 지금 지금

줄포면사무소 창고안에 보관되어 있는데

 

공덕비는 공덕을 쌓은 사람을 기리기 위해

그 사람의 행적을 새겨 세운 비를 의미하는데

매국노인 이완용의 공덕비를 보존하여야

하는지의 여부로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매국노 이완용에 대해 다시한번 알아보려 해요.

이완용은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을한

을사조약 체결을 하고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와 한일합방조약 체결을

주도한 인물로써 정미칠적 을사오적 경술국적

모두에 들어가 있는 가장 대표적인 매국노로 알려져 있어요.

 

 

대표적인 친일파로 알려져 있는 이완용은

한 한마디의 일본어도 하지 못했다고 해요.

원래 이완용은 당시 강대국이었던

러시아를 친애하던 친러파 였는데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친일파로 돌아선 것이죠.

그저 어느 나라든 강대국의 편에

서기로 한 것으로 보여요.

 

  그런 이유로 역사가들은

기회주의자 박쥐 같은 인간 이라고

이완용을 평가하고 있는데

이완용이 남긴 유언에서도

이 박쥐 같은 면모가 드러나 있어요.

 

이완용은 유언을 한 후 얼마되지 않아 죽었는데

사후는 생전보다 더 화려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이완용의 장례 행렬은

이완용이 살던 3천 평짜리 집이 있던 옥인동부터

광화문까지 이어졌는데

고종이 돌아가신 이후 최대의 인파가 몰렸다고 해요.

 

전라북도 익산군에 장지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매국노이다 보니

지속적인 훼묘사건이 빈번이 일어났어요.

그나마 일제강점기 때는 양반이었는데

광복 이후에 심하게 훼손이 된 것이죠

지속적으로 훼묘 사건이 일어나서

이완용의 증손자 이석형이 파묘를 하고

화장하고 지금은 이완용의 묘가 있었던 곳이

채석장으로 바뀌어 있어요.

 

 

파묘할 때 보았더니 여러번 훼손된 묘였건만

붉은 명정에 쓰인 조선 총독부 부의장이란 글만은

상하지 않고 그대로였다고 해요.

 

 

한 마디로 말해서 매국노의 말로를

제대로 보여준 것이죠.

 

또한 직함이 엄청나게 많았어요.

-조선귀족원 회원-

- 농사장려회 회장-

- 조선물산공진협찬회 명예회원-

- 일본제국군인후원회 조선지부평의원 -

- 조선귀족회 부회장 -

- 농림주식회사고문 -

- 교육조사위원 -

- 총독부산업조사위원 -

- 조선미술전람회심사원 -

- 조선사편찬위고문 -

- 조선농업교육연구회고문 -

- 선만노몽(조선, 만주, 러시아, 몽골) -

연구협회고문 등을 지냈다고 하네요.

 

 

이런 모습 때문에 이완용은

2002년에 국회의원 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6(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어 있고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이완용과 이완용의 손자인 이병길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하여 현재 환수작업이 진행 중이에요.

2009년에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도 당당하게 이완용의 이름이 들어가 있죠.

 

이완용은 활개를 펼치던 1910년대에

토지와 임야 등 확인된 것만 해도

여의도 면적의 약 2배에 해당하는 1,300여 필지

1,600를 소유했던 것으로 밝혀졌어요.

일제때에 구입한 토지를 현금화했는데

그 규모는 아직까지도 파악이 되지 않고 있대요.

이완용의 증손자인 이윤형씨는 친일파 후손 중

최초로 토지 반환 소송을 제기하여서

19977월 승소하였으며 반환된

북아현동 일대의 토지는

그 당시 시가로 30여억원이 되었다고 하네요.

 

 

이완용의 증손자 이윤형은 승소하고 바로

토지를 처분하고 캐나다로 이민길에 올랐어요.

그런데 놀라운것은 어느 방송사의 추적 결과

이윤형 혼자 이민을 떠났고

본인 이외의 남은 다른 자손들은

궁핍하게 살고 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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